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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조의 레이서 니키 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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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라인_S 2018. 2. 21.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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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8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F1의 레전드 중 한 명으로 불사조란 별명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 다른 사람들의 불사조란 별명은 비유적인 의미지만 이 사람은 진짜 불속에서 살아 나왔다.


1949년 오스트리아에서 명문 금융재벌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그가 레이싱을 하는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라우다는 이에 반발하여 집안을 뛰쳐나와 레이싱을 이어가게 되었다. 무일푼으로 집안을 나온 탓에 은행 융자를 받을 당시 담보잡을 게 없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잡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F3, F2를 착실히 거쳐 나가 71년 마치 팀에서 드디어 F1 데뷔를 가졌고, 이후 BRM으로 이적한다. 루키 시절의 퍼포먼스는 그렇게 좋지 못해서 BRM 드라이버 시트를 확보하기 위해 자기 이름으로 대출을 받아 그 돈을 팀에 건내줘야 했다. 그러나 BRM에서 만난 한 사람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데 그 사람은 바로 팀메이트 클레이 레가초니. 성적은 부진하지만 그의 무궁무진한 포텐셜을 간파한 레가초니는 이듬해인 74년 친정팀 페라리로 복귀하면서 구단측에 라우다를 영입할 것을 강력히 추천했고 이 덕분에 라우다는 페라리의 차를 몰게 된다. 페라리에 입단한 라우다가 Ferrari 312B의 머신 테스트 후 엔초 페라리에게 한 말은 "쓰레기만도 못한 차지만 내가 어떻게든 잘해보죠."


페라리 팬들은 처음엔 커리어가 시원치 못한 그를 미덥잖게 여겼고 페라리에서 첫해의 성적 역시 그저 그랬지만 이듬해인 75년에는 개인 첫 드라이버 챔피언이자 페라리에 10년만의 챔피언을 안겨 준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가 난리났던건 물론이요 무일푼으로 내쫓았던 집안 식구들도 이제는 그를 인정하게 되었음에도 정작 그는 무덤덤했다고. 챔피언 트로피를 동네 카센터 무료세차권과 교환했다고 한다.


이듬해에도 그의 페이스는 최고조였고 5승을 챙기며 그의 전성기를 순조롭게 이어나가는 듯 했다. 그런 상황에서 문제의 독일 GP를 맞이한다. 


악명높은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에서 그의 차량이 타이어와 브레이크에 문제를 일으키며 충돌, 화염에 휩싸이게 된다. 동료 드라이버들의 목숨을 건 구조와 페라리 측의 신속한 지원요청으로 가까스로 구출되었으나 전신의 3도 화상, 골절, 유독가스로 인한 폐손상을 입게 되었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가망 없다는 판정을 받았으며, 신부 입회하에 병자성사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명을 계속 이어나가더니, 급기야 6주 후인 이탈리아 GP에서 아직 화상이 덜 나은 몸으로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로 레이스에 복귀한다. 그리고 당당히 4위로 레이스를 마침으로써 불사조란 별명을 얻는다. 라우다는 이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빨간모자를 쓰고 다니며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가렸다. 그렇다고 라우다가 본인의 외모가 망가진 것에 스트레스를 받았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심지어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잘려나간 귀를 가리키며 "전화 받기 편한 귀가 되었어."라고 킬킬거리면서 농담까지 했을정도.


그해 마지막 경기인 일본 GP에서 챔프가 유력한 상황에서 3그리드를 확보하고도 그는 레이스에서 폭우가 내리자 안전문제를 이유로 레이스를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챔피언 자리는 친구이자 라이벌인 맥라렌의 제임스 헌트에게 단 1점차로 넘어간다. 독일 GP에서 천국 문턱까지 밟았다가 돌아온 걸 생각하면 이해할수 있는 결정이었지만, 페라리의 오너인 엔초 페라리는 이 결정에 대해 불같이 화를 냈고, 이로 인해 페라리와의 사이는 점점 벌어진다. 독일 GP에서의 사고에서 후속조치가 미흡했던 데 대한 항의의 표시로 다음 그랑프리인 오스트리아 그랑프리를 아예 페라리 전체가 보이콧했을 정도로 라우다를 아꼈던 엔초 페라리가 이럴 정도였으니 이 레이스 포기 결정이 얼마나 파급효과가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듬해인 77년에도 변함없는 기량을 과시하며 다시 페라리에 드라이버 챔피언십과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안겨줬지만, 엔초 페라리와의 사이는 점점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결국 78년 브라밤으로 이적, 두 시즌을 활동한 후 "목숨걸고 빙글빙글 도는게 지겹다."며 첫번째 은퇴를 한다.


비행가 조종사 자격증을 갖고 있었던 라우다는 이후 그동안 모은 자본을 바탕으로 저가 항공사인 Lauda 항공을 설립하고 CEO이면서 조종사로도 활동한다. 몇년 후 항공사는 자금난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그 때 맥라렌에서 드라이버 복귀를 제의 해왔다. 항공사 운영 자금이 필요했던 라우다는 이를 수락하면서 82년 다시 F1에 복귀한다.


이미 죽을 고비도 한번 넘겼고, 나이도 30대 중반으로 넘어가는 시점이었지만 그의 기량은 여전했다. 복귀 첫 시즌에 5위를 하며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었고 2년 후인 84년 팀 동료이자 후배인 알랭 프로스트를 간발의 차로 제치고 개인 통산 세번째이자 마지막인 월드 챔피언이 된다. 그리고 85년 1승을 거둔 것을 마지막으로 두번째이자 최종 은퇴를 한다.


은퇴 이후로는 라우다 항공의 CEO로 계속 활동하다 주주들과의 마찰로 라우다 항공에서 손을 떼고 2001~2003년에는 재규어 F1팀의 보스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2003년 또다른 저가 항공사인 Niki Air를 설립, 현재까지 CEO겸 조종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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